내 글을 본 사람들이 어디에서 퍼온 글이냐고 물어올 때 나는 당혹스럽다.
나쁘게 생각하면 너 같은 친구가 어찌 이런 글을 썼을까 라는 의미이고 좋게 생각하면 글이 꽤나 그럴 듯하다는 뜻인
듯해서이다. 그 어느 편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나는 글을 편히 쓰는 편이 아니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퇴고에 퇴고를 거듭한다.
그리고 신변에 관련된 일은 가능하면 피하려한다. 사생활을 시시콜콜 늘어놓아본들 글만 너절해지리라는 생각이 우선해서다.
그래서인지 내 글의 주된 관심사는 나와 너를 떠난 우리가 될 경우가 많다.
그런데 나를 떠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글을 쓸 때 어떻게 내가 나를 떠날 수 있단 말인가.
노장(老莊)에
심취한 도학인도 아니고 유체이탈에 자유로운 심령술사도 아닌 바에야 나는 결코 나를 떠날 수 없다. 그러나 글을 쓰면서 내 자신의 관점에서
완벽하게 벗어날 수 없다 할지라도 나는 객관적이고 싶고 중립적이고 싶다. 내가 그리는 대상의 본모습이 온전히 드러나도록 나는 조금 떨어져 있고
싶은 것이다.
이런
태도가 조금은 낯설기도 하고 조금은 낯익기도 한 것인가 싶다.
사람들은 내 글이 신문 사설 같다고도 하고 논평이나 평론 같다고도 하며 심지어는 교과서 같다고도 한다. 그러니 사람에
따라서는 내 글을 두고 구체적으로 어느 신문에서 가져왔느냐고 묻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나는 그 물음에 얼마든지 너그러울 수 있다.
그러나 내 글을 두고 자신의 잣대로 굳이 그 어느 한편에 세워두려는 시도를 당하면 나는 불쾌하다. 스스로를
기존의 정치세력과 연결 지어 판관(判官)과 같은 태도로 내 글을 단정하려 할 때 내 불쾌감은 극에 달한다. 금도를 지닌 어떤 비유도 없이
직설적인 언어로 납득불가인 논리로 접근해올 때는 사실 역겹기조차 하다. 이는 논리 이전에 예의에 관한 문제다. 이러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나보다 연하이거나 심지어 스무 살도 더 어리기까지 하다. 그들은 내게 무엇을 가르치고 싶었던 것일까.
20대의 나는 논리로 세계를 접수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당시 내가 어른들이나 선배들에게 취한 태도를 생각하면 등에서 땀이 다 난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고 존경하는 육친의
가형(家兄)에게조차 나는 되도 않은 논리를 앞세우는 되바라지고 버르장머리 없는 막내 동생이었을 뿐이다.
스무
한살 때인 대학생 때에는 누구라면 다 알만한 현직의 방송국 사장을 강연장에서 거세게 몰아세운 적도 있었다. 80년, 봄이 한참인 그때 목사이기도
하셨던 그 분은 단상에서 물어뜯을 듯이 쏟아내는 내 말에 허허 웃기만 하셨다.
‘악을 선으로 대하자’는 그 분 말씀에 나는 벌떡 일어나 ‘목사님 말씀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도대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란 말인가. 우리 사회는 해방이후 지금까지 단 한번도 이전 시대가 말끔히 정리된 적이 없었다. 오늘에 이르러 유신 잔당의 철저한
제거야말로 우리 시대에 있어 최고의 선이며 최선의 소명이다.’ 라고 외칠 듯이 말했었다. 3천명 가까이 강당을 가득 메운 학생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공감을 표시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역사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삶은
조금 더 복잡하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인간의 삶이 어우러져 비빔밥처럼 만들어내는 세계(世界)의 양태(樣態)는 더욱 복잡하다. 그것이
빚어내는 진보와 보수의 역사 역시 그렇게 명쾌하고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철학의 인식대상으로서도 그렇고 현실의 진행과정으로서도
그러하다.
역사는
씁쓸한 흐름이다.
역사는 매순간 모든 것을 안고 흘러갈 뿐이다.
머물지 않으면서 머물고 머물면서 머물지 않는 강물의 흐름과 마찬가지로 역사는 나아갈 듯 멈추고 멈출 듯 나아간다.
그리고 그 흐름 위에서 결국 모두들 떠내려가는 것이다. 당신 역시 마찬가지다. 당신이라 하여 이 ‘떠내려감’에서 결코 예외일 수 없다.
모두들
떠내려가는 와중에서 몇 가닥의 나무토막, 몇 점의 돌조각을 집어 들었다 하여 뒤쳐진 자들을 향해 발을 구르며 비난하는 태도는 과연 온당한
것일까.
흐름을
가로막는 것이 진정 누구 때문인가는 더 흘러가 보아야 알 수 있음에도 핏발을 세운 채 ‘너 때문이야.’라고 외치는 것은 또 얼마나 우습고 치졸한
태도인가.
나는 대학 4년을 내리 골방에서 지냈다.
그것은 선배의 골방이기도 했고 친구의 골방이기도 했고 내 자신의 골방이기도 했다.
거리는 화사하고 투명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우리의 골방은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 늘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권력의 입장에서 우리는 소수였고 이단이었다.
그러나
극단의 집단으로 내몰리면서도 변화, 발전할 역사에 대한 믿음을 저버린 적은 단 한차례도 없었다.
저항은 단호했고 피해는 심각했다.
우리의 싸움은 촛불 시위와 같은 왁자지껄한 이벤트가 아니었다.
밴드가
동원되고 연예인이 사회 보는 광화문의 놀이축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신념과 양심에 인생과 목숨마저 걸어야 하는 절체절명의 투쟁이었다.
우리는
외롭게 끌려가 짓밟히고 얻어맞았다.
선배와
친구가 개처럼 끌려가며 무수히 얻어맞는 것을 수도 없이 지켜보았었다. 그 치욕과 굴욕의 현장에서 나는 울면서 돌을 던졌다. 아무 죄도 없을
사복의 전경들에게 돌을 던지며 복받치는 가슴을 어쩔 수가 없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나는 왜 빌어먹을 사회과학을 공부했는가.
나를 붙잡으려는 경찰들을 이리저리 피하며 나는 울면서 손에 쥐고 있는 돌을 결코 놓지 않았었다.
나는 그렇게 돌을 던지면서 변증법을 익혔다. 담배연기가 가득한 골방에서 일본어를 배웠고 그것을 통해 경제학과 철학을
배웠다. 그것은 저항과 투쟁의 수단이었고 살아남은 자가 지녀야 할 삶의 지침이었다. 그리고 그 골방에서 우리는 작별했었다.
많은
벗들이 감옥에 갔다.
친구도
갔고 선배도 갔고 후배도 갔다.
심지어
시위 도중 도서관 난관에서 떨어져 죽은 친구도 있었다.
골방의
친구들은 그렇게 깨끗하게 자신을 포기했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적어도
정치적 구호를 외쳐 짓밟히고 얻어맞는 사태가 없어진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나는 이 시대가 너무 허전하고 허망하다. 내가 예전에 적대시한
사람들에게 진보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배덕(背德)과 무례를 바라보며 나는 오히려 부끄러워진다.
무릇
이론(理論) 없는 혁명은 없다.
지상혁명론(紙上革命論,
revolution on paper)을 논할 것조차 없이 정부, 여권에 의해 청사진도 없이 진행되는 중구난방의 이 모든 사태가 개혁이라
불리어지는 것에 대해 나는 도무지 어안이 벙벙하다. 매사에 학문적 논의를 우선하지 않은 채 유아독선(唯我獨善)으로 치닫는 권력의 광기에 대해
대체 무슨 말을 하여야 할 것인가.
사회주의 혁명을 하지 않을 것이라면 이 모든 독선의 결과는 고스란히 가난한 자의 몫이 될 것이 분명하다. 가진 자는
정권이 바뀔 때까지 5년이고 10년이고 외국에서 골프나 치며 기다리면 될 뿐이다. 자본주의를 폐기하지 않는 한, 가진 자의 돈을 권력이라 하여
어찌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사회와 이 정권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은 나를 포함하여 가난한 자에 대한 이 같은 염려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나의 우려는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닌
한 전혀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정권의 입장에 서서 내 글을 비판하는 젊은 친구들의 의도는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그들의 의도가 그 무엇이든 또 그들이 어떤 진보성으로 이 정권을 지지하고 옹호하든 나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자유에 관한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진보가 내게 함부로 강요될 때 나는 참을 수가 없다. 어떤 학문적 배경과 어떤 논리적 훈련에 의해
연마된 진보론인 줄은 알 수 없으나 젊은 친구들에게 그것을 강요받기에는 나는 어린시절부터 이미 너무 많은 진보를 경험해왔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진보에 다만 구토가 날뿐이다.
왕수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khl600
제목: 진보의 이름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