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眼)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아버지를
찾아 동대문에서 고속버스를 탔다.
원주
터미널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횡성으로 가야 했고, 횡성에서 안흥면으로 들어가는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오전 이른 시각 출발하여 해가 뉘엿뉘엿 기울
즈음 안흥에 도착한 나는 중학교를 찾았다. 사람들이 학교 숙직실이라 일러 준 곳 가까이에서 아버지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 나는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얼굴을 찌푸리며 힐난조로 내게 물었다.
“안경은
언제부터 썼어?”
“한
달 전부터요.”
“어째,
집안 애들이 모두 안경을 쓰냐?”
“......”
일년
가까이 만나지 못한 아버지였지만 첫 인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나빠진 내 눈보다 형들의 대학 등록금 때문에 더 마음이 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돈 문제로 아버지에게 보내어진 심부름꾼이었으니까.
아버지는
조금 더 짜증을 내다가 결국 내 눈에 대한 걱정으로 그 모두를 마무리하였었다.
아버지는
일흔 중반에 돌아가실 때까지 안경은 물론 돋보기조차 들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눈이 밝았다. 아버지가 영어 선생이었고 늙어서도 영어책을 늘 보고
계셨던 분이므로 눈을 쓰지 않아 눈이 밝았다는 식의 설명은 통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선천적으로 눈이 좋았고 사시는 동안 내내 그것이 유지되었다.
나의 약한 시력은 전혀 아버지 탓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실 어머니 탓이었다.
일제시대에
찍은 외갓집의 사진을 보면 삼촌이나 이모가 모두 안경을 쓰고 있다. 어머니 가계의 약한 시력의 유전자는 우리 형제에게 그대로 대물림되어 삼형제
모두 고도 근시에 난시까지 겹쳐 있는 것이다. 두 형에 이어 막내인 나 역시 중학생 교복에 뿔테 안경을 걸치고 나타났으니 아버지 입장에서는
짜증이 날 만도 한 일이었다.
‘우성
유전자만 받아도 살 일이 고달플 텐데 제 어미의 안 좋은 눈까지 닮아 있으니…….’
대학
4학년 때에는 나는 지쳐 있었다.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는 학교생활이 너무 힘들었다. 군대가 가고 싶었다. 그것도 휴전선 전방의 철책선 근무지에 콱 쳐 박혀서 휴가도 없고 면회도 없는,
그런 삭막한 곳에 있고 싶었다.
본적지
신체 검사장은 경상도 사투리로 와글거렸다.
팬티만
입은 채 몸무게를 재는 열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을 때, 그 옆을 지나던 군의관이 나를 포함해 안경을 끼고 있던 두세 명을 불러 암실(暗室)로
데려갔다. 조명이 모두 꺼진 어두운 그곳에서 나는 낯선 기계 앞에 턱을 대고 눈앞의 빨간 점을 응시했다. 양쪽 눈의 검사를 모두 끝내고 군의관은
내게 말했다.
“너는
군대 못가.”
머뭇거리며
선 채로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있자 그는 다시 한번 말했다.
“마이너스
디옵터의 근시에다 난시까지 겹쳤고 왼쪽 눈과 오른 쪽 눈의 시력 차가 심한 부동시(不同視)에다 왼쪽 눈은 또 약시(弱視)야. 그래서 너는 군대에
갈 수 없는 거야. 다른 검사는 받을 필요도 없어. 이것 들고 저기 보이는 징집관에게 바로 가.”
그는
내가 들고 다니는 신체검사 용지를 뺏을 듯이 잡아채더니 뭔가를 적어 주었다.
나는
그 군의관 말대로 다른 모든 검사를 생략한 채 징집관 앞에 가서 서류를 제출하고 대기했다. 신체 검사장에서 내가 한 일이라곤 암실의 기계에다
턱을 올려놓은 일 뿐이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 징집관이 이름을 호명하며 등급 판정과 입영 사항을 통보하면 해당자가 같은 내용을 복창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내 차례가 왔다.
“넷,
아무개, 제 2 국민역, 징집면제.”
나는
그렇게 복창하고 신체 검사장이던 대구를 떠나 서울로 돌아왔다.
군대에
가고 싶어 받은 신검 결과는 병역 면제는 물론이고 예비군 과정도 없이 바로 민방위에 편성되는 것이었다.
그
다음 주, 관할 동사무소에 판정 등급과 면제 사항을 신고하였을 때에는 담당 방위병이 나를 부러운 듯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방위병은 며칠 후
여름방학 기간 중이어서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던 나를 찾아왔다. 방위복을 단정히 입은 그는
“문정
동사무소에서 왔어요. XX 대학 다니시죠? 말씀 좀 나누었으면 해서.......”
동사무소에서의
일면식만으로 이토록 심각한 표정을 짓고 찾아온 것이 의아하여 나는 그를 따라나섰다.
아파트
상가의 다방에서 그는 더욱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를 읽어보셨죠? 거기에서 니체는.......” 하며 느닷없이 니체 이야기를 꺼내어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자신은 방위병으로 근무하며 그 동안 대화 상대자가 없었는데 동사무소에 보관된 내 주민등록표 원본에 누군가 연필로 내가 다니는 대학을 적어 놓은
것을 보고 비로소 대화 상대를 찾았다 생각하여 이렇게 찾아왔노라고 했다.
입영이
거부되고 취직 걱정이나 해야 하는 사람을 붙잡고 자라투스트라 운운하니 나는 짜증이 났다. 에어컨을 켰다고는 하지만 다방은 후덥지근하기도 했다.
“자라투스트라가
이렇게 말했는지 저렇게 말했는지 잘 모르지만 저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그 방위병에게 빠른 어조로 이야기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지하고
심각했던 방위병과의 인연도 따지고 보면 나쁜 시력 때문이었고 안경을 썼던 그가 내게 연대 의식을 느꼈던 것도 나쁜 눈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가 느낀 연대감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고 더욱이 자라투스트라가 어떻게 말했는지에 관해서도 잘 몰랐다. 무엇보다도
에어컨도 시원찮은 동네 다방에서 땀을 흘려 가며 초면의 동사무소 방위병과 앉아 ‘자라투스트라’가 어떻다느니 하는 말들이 가당찮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신체검사를
받은 지 20년도 더 지났다.
머리에
약간씩 흰 머리가 나기 시작하지만 나는 언제나 이십 대다. 나로선 자신이 사십 대의 아저씨라는 사실이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것은 나이
들어 보이지 않는 내 외모 탓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몸의 여러 징후는 물리적인 나이를 내게 확인시켜 주었다. 조금씩 비만이 오고 몸은 내부에서부터 부실해졌다. 장(腸)이 나빠지면서 자주 배가 아파
왔고 몸이 쉬이 피곤해졌다. 병원에 가는 일도 잦아졌다. 2년 전 맹장 수술을 받으며 확인한 바로는 대장(大腸)에 게실(憩室, 겉주머니)이
여기저기 징그럽게 달려 있었다. 장압(腸壓)이 높아져 대장의 여기저기가 돌출된 것이다. 의사는 내게 술과 담배를 줄이고 스트레스를 받지 말고
조심하면서 살라고 했다. 치과의사도 내게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잇몸이 안 좋아 이빨이 모두 빠질 지경이니 술과 담배를 않는 것이
좋겠다고.......
보름
전쯤인가는 배와 옆구리가 몹시 아팠고 그 통증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 같았다. 비뇨기과 의사 친구에게 전화를 하니 아무래도 결석이 요로를 타고
내려가고 있는 것 같으니 병원을 가보라고 하였다. X 선 촬영과 I. V. P. 촬영을 하여 확인해 보니 요도는 결석으로 막혀 있었고 양쪽
신장(腎臟)은 돌이 박혀 있었다. 콩팥의 돌은 나중에 처리하기로 하고 요로의 결석을 쇄석기로 깼다. 친구의 후배인 비뇨기과 의사는 쇄석기
사용료를 오십 프로 디스카운트해 준다며 덧붙였다.
“우리도
남는 것 없다고요.”
물론
몸속에 돌이 생기는 것은 나이 탓이 아닐 수 있다고 자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젊은 나이에도 몸속에 결석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제의 일은 그러한 자위를 모두 우습게 만들었다. 나는 아직도 이십 대 기분이라는 따위의 생각은 접어 버리기로 하였다.
어제는
바람이 몹시 불어 추웠지만 오후에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얼마
전부터 글자가 잘 보이지 않고 초점도 제대로 맞추어지지 않아 안경알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근처 압구정동 안과로 시력 측정을 하러 갔다. 찬
바람을 맞으며.
젊은
검안사(檢眼士)는 시력에 맞는 것이니 렌즈를 바꿀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럼
왜 이렇게 침침해 보이냐는 질문에 내 얼굴을 한참이나 보더니
“얼굴은
젊어 보이시는데.......” 하는 것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다시 묻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원시(遠視)가
오는 거죠. 다시 말해 노안(老眼)이 시작되는 겁니다.”
앞으로
2,3년간 돋보기를 낄 필요는 없지만 하여튼 원시가 진행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사무실로
돌아오며 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어떻게 말하셨을까, 그리고 그 방위병의 자라투스트라는 또 어떻게 말하였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달리 할 말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쓸쓸히 생각하는 것에 오히려 무조건 동의할지도 모를 일이다.
세월이
가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늙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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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눈(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