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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대야소 현상은 미국과 프랑스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그래도 국정운영에 차질을 빚지 않는다. 대화와 협력의 전통이 의회를 지배할 뿐 아니라 균형 잡힌 여론이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의회 내에서의 다수 세력의 횡포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만약 그랬다가는 이들 나라에선 다음 선거에서 줄줄이 낙선할 것이 너무도 분명하다.

대한민국 헌정사 역시 몇 차례의 여소야대를 경험했다. 그러나 우리의 여소야대는 합리성보다는 지역성으로 돌파되었다. 이 땅에서의 선거 패배란 지역 연합의 실패를 의미했다. 따라서 선거의 승패란 당초부터 승복할 수 없는 논리구조를 안고 있었다. 반대정파의 의회지배는 패자에게는 견딜 수 없는 부조리와 불합리였을 뿐이다. 그 패배의 모욕과 굴욕을 뛰어넘기 위해 정치 철학과 이념에 관계없는, 새로운 지역 연대로 정치판은 언제든 엎어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그 결과 지역 연고에 따른 각 정파의 복잡한 합종연횡으로 선거 후의 정치지형(政治地形)은 수시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새로이 헌법을 개정하여 탄생한 6공 정권은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3당 합당으로 여소야대를 타개하였다. 뒤이은 문민정부 역시 무소속의 무차별영입으로 여대(與大)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이합집산의 기본 컨셉은 말할 것도 없이 지역성이었다.

그들이 그토록 악착같이 의회 다수석을 차지하여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은 바로 IMF 사태였다.

여소야대를 돌파하는 또 다른 방식은 우회(迂廻)였다.

대선을 앞두고 급조된 지역 연합이 일단 집권에는 성공하지만 최종적으로 의회 장악에 실패할 경우 새로운 권력이 의회를 우회하여 각종 사회단체와 정치적 협력을 이루는 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우회 방식은 국민의 정부에서 처음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TJP 연합에도 불구하고 의회 소수파로 출범한 김대중 정권은 임기 내내 국회로부터 발목이 잡히는 악몽 같은 정치 현실을 경험하여야 했다. 국민의 정부가 소수파로서의 벽을 실감한 것은 정권 초기 총리인준이 장장 6개월간 미루어지면서부터였다. 그러나 그것은 서막에 불과하였다. 정권은 의회와 내내 대립하고 불화하였다. 국회의 대정부 견제는 일상화되었고 정권의 한 축을 이루던 자민련의 이탈은 정권을 더욱더 고립무원으로 빠져들게 하였다.

지역연합으로 출발하여 결국 지역연합에 포위되는 형국이 되어버린 것이다.

정권 중반기에 이미 지역적 고립은 회복불능의 상태에 이르렀다.

따라서 DJ 정권은 기존의 방식보다 좀 더 새롭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이 최종적인 돌파구로 선택한 것은 시민단체였다.

권력이 시민단체를 주목하자 온갖 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생소한 단체가 시민의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의회의 외곽 어디에선가 ‘시민’이라는 수사(修辭)로 협조를 받는 대가로 정권은 국가 재정으로써 이들의 활동을 뒷받침하였다.

시민의 이름으로 정치행위를 하는 이들 단체들은 도무지 거칠 것이 없었다. 법적 절차를 과감히 무시하며 그들은 낙선운동을 펼쳤고 모든 사회적 이슈에 대해 정치적 발언을 마다하지 않았다.

국민의 정부는 ‘시민의 정부’였다. 국민의 정부는 시민 단체의 천국을 만들어 마침내 ‘시민의 시대’를 개막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시민이 어떤 시민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그들이 대표하는 시민은 누구인가.

그들은 어떤 절차에 의해 대표성을 획득하였는가.

그러나 그들은 무조건 대표였다. 대표이었으므로 모든 사회적 현상에 대하여 전문가 대우를 받았다. 도로를 뚫든 항만을 건설하든 의약분업을 실현하든 입시문제를 개선하든 국민들은 전문가에 앞서 시민단체의 발언부터 들어야 했다. 국민의 정부 내내 그들은 모든 문제의 전문가였고 실력자였으며 판관이었다. 그들은 검사였고 판사였으며 동시에 변호사였다.

그들은 슈퍼맨이고 원더우먼이었다.

이러한 전통은 노무현 정권의 참여 정부에서 더욱 확대 발전되었다.

노사모의 활동으로 대선 승리에 힘입은 바 있는 노정권의 지지자들은 ‘국민의 힘’, ‘국민 참여 0415’와 같은 유사단체의 활동을 총선에 활용하였다. 인터넷을 활동의 주무대로 삼으며 이들은 노 정권에 반대하는 정당, 사회단체에 끊임없이 압력을 행사하였다. 이제 이들은 여타 시민단체와 함께 참여 정부의 주요한 권력의 원천이 되었다.

열린우리당이 과반의석을 획득하여도 이들의 활동은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의 권력이 넘치고 넘쳐 이들 내부의 균열을 국민들이 지켜보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 모든 사태는 정치파행의 결과다.

의회의 의석수가 지역성으로 조정되거나 의회의 권능이 특정단체의 활동으로 위축되는 순간 정치는 이미 맛이 간 것으로 보아 무방하다. 이는 일체의 대화를 거부하겠다는 의사표시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도 시민단체는 플래카드를 든 채 거리로 나서고 있다.

무엇이 어긋났는지 이제 더 이상 그들은 권력의 편도 아닌 듯싶다.

그런데 여러 단체가 저토록 거리를 메울 동안 국회는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시민의 이름을 내건 단체가 저리도 많은데 도대체 그 ‘시민’은 어디로 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