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 SBS)
"아니 그 시험은 무엇으로 보느냐. 너희만 아는 너희만 배울 수 있는 한자로 시험을 본다. 양인들도 시험을 통해 관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한자를 아는 사람들만 관리가 되는 게 아니냔 말이다. 이대로 가면 백년 뒤에는 서열들의 과거가 금지될 것이고, 이백 년이 지나면 양반들만 시험을 보게 될 것이고, 삼백 년이 지나면 양반들을 사고파는 지경이 될 것이다"
이것은 <뿌리깊은나무>라는 연속극 19회에서, 한글반포를 반대하는 최만리에게 세종이 하는 말이다.
이 말은 참으로 옛날 일이 아니라 오늘의 일에도 그대로 맞는다. 세종이 세계가 극찬하는 훌륭한 글자를 만들었지만 그후로도 사람들은 외국어를 통달하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 한동안 한자는 진서라 하고 한글은 언문이라 하여 한자를 떠받들고 한글을 낮춘 것은 세종의 저 말대로 한자를 아는 자들만이 과거를 보고 관리가 되는 기득권을 오래오래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백성들이 한글을 배워 누구나 쓰는 기쁨과 읽는 기쁨을 알고 쓰고 읽기를 즐기게 되면 한자를 독점한 자들의 기득권이 쓸모없는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한글창제와 반포를 반대한 것이다.
그런데 일제치하에서는 일본말이 공용어가 되고 조선말은 학교에서 쓰지도 못하게 하였다. 그때도 시골의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조선말을 쓰면서 착취당하면서 살았고 도시의 배운 자들은 일본말에 통달하여 그걸로 시험을 보고 판사가 되고 관리가 되어서 친일파가 되고 총독부 직원들이 되었던 것이다. 그 아래로는 순사가 되고 관리가 되어 일본말을 줄줄 하는 것을 가장 큰 자랑으로 여긴 것이다.
우리 어릴 때에도 동네 아저씨들이 뭔가 자기가 좀 부족하다 싶으면 일본말을 하는 걸 보았다. 우리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데 일본말로 하면 이해가 빨리 된다는 것이었고 일본말을 알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때는 멀리 갈 때는 기차를 갈아타야 했는데 그걸 일본말로 기리까이라고 하였다. 그냥 우리말로 갈아탄다고 하면 될 걸 그 아저씨들은 꼭 기리까이라고 했다. 말싸움을 하다가 자기가 좀 밀린다 싶으면 난데 업이 쏘데스카 난데스카 이런 말들을 하는 걸 들었다. 그때가 아마 70년대일 텐데 그때도 일본말을 쓰는 걸 자랑스레 여겼던 모양이다.
얼마 전에 라디오에서 한 코메디언이 시청자와 전화 연결하여 이야기 주고받는 프로에서 이런 얘기를 들었다. 오징어가 주제였는데 한 시청자가 자기네말로는 수루메라고 한다고 하니까 또 다른 시청자가 자기네 사투리로는 이까라고 한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진행자가 아하 전라도 말로는 수루메 경상도 말로는 이까이군요. 이런 식으로 받아넘기는 것 같았다. 우리가 어릴 때에도 노인들이 그런 말을 많이 썼기 때문에 나도 아는 단어들이었다. 하지만 난 그 말들이 우리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중에 일본말을 아는 이에게 물어보니 둘 다 일본말이며 수루메는 말린 오징어이고 이까는 물오징어를 가리킨다 하였다.
요즘은 영어가 일본어를 대신해서 사람들에게 출세의 수단이 되고 있다. 전에는 제2외국어로 독어 불어 일본어를 많이 택했는데, 요즘은 무조건 영어만 해야 한다고 다들 미국에 연수 보내고 여의치 않으면 필리핀이든 어디든 영어를 하는 나라에로 자녀를 보내서 영어를 배우게 하려고 한다.
대학생 시절에 어느 분이 내게 영어 잘하는 비결을 알려주겠다 했다. 자기가 아는 영어를 우리말처럼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늘 영어성경을 열심히 읽다 보니 지금은 영어 박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영어를 열심히 해야 복음 전하는 데도 좋다고 하면서 조용기 목사가 영어를 잘 한다는 말과 그처럼 영어로 복음을 외칠 수 있으면 얼마나 세계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그러면서 서울에 어느 교회에 가면 외국인을 위해 영어로 예배를 하는데 그런 데 가서 배우는 것도 하나의 길일 것이라 추천해 주었다. 아마 이런 생각 때문에 교회에서 영어 예배를 하는 곳들도 늘어난 것 같다. 처음엔 외국인들을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영어공부를 위해서 중고등학생들이 그 예배에 많이 참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프란츠 파농의 연구에는 식민지배를 받는 백성들이 지배자의 언어를 배우려고 하는 심리가 잘 묘사되어 있다. 지배자들이 원주민을 미개하다고 가르치고 그들의 언어는 미개하므로 써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원주민들은 자기 말을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지배자인 프랑스말을 유창하게 하는 것을 최고의 소원으로 갖는다는 것이다. 그들의 꿈은 검은색 피부가 희어지는 것과 같이,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해서 파리의 사교계를 주름잡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말을 부끄럽게 여기고 자기 원수의 말을 흠모하는 데서 정신분열이 온다고 보았고 이런 식민지배야말로 정신분열의 온상이라고 비판하였다.(검은 피부 흰 가면)
최근 정신분석학 강연을 들으면서 정신병의 근원이 자기 안의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끄럽게 여기는 데서 기원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건강하려면 자기 속에 있는 그림자마저도 통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하물며 자기의 말을 부끄러워한다면 그것은 분명 우리를 병들게 할 것이다.
내가 제일 재미없게 들은 설교는 외국에서 어느 신학대학 총장이네 유명한 신학자네 하는 사람들이 와서 설교하는 것이다.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모르는지 그네들은 으레 한국에 와서도 영어로 설교하고 말하고 싶은 대로 지껄인다. 그 내용은 거의 들리지 않고 정말 재미없는 내용인데도, 단지 영어로 말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감동은 받는 건지 모르겠다. 나도 영국에 잠시 머물 때 학생들이 예배 인도하는 순서가 있었는데 거기 설교를 맡으라 하여 맡은 적이 있다. 영국 사람들 앞에서 영어로 설교하려니 참 힘들고 준비하는 데 진땀을 뺐다. 거기서 내가 한국말로 설교하겠다 하고 통역을 붙인다고 했으면 그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아마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강단에 와서 영어로 말하는 걸 너무 당연스럽게 여기고 그런 데 참여하는 걸 영광으로 안다. 그게 강연회라면 거기서 통역하기 전에 먼저 알아듣고 웃을 수 있다거나, 또는 질문 시간에 유창한 영어로 질문을 할 수 있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긴다. 난 이런 것은 우리가 식민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것들을 다 적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끝으로 예수님 이야기다. 예수님은 외국어에 능통하지 않으신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영어의 조상말인 그리스말이 공용어였다. 그러나 예수는 그리스말을 사용하지 않고 우리식으로 하면 일제시대 조선말에 해당하는 아람말을 사용했다. 그 흔적이 마가복음에 조금 남아 있는데,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면서 ‘에바다’(열려라)라고 하고 잠든 소녀를 일으키면서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이라고 하고 십자가 상에서 ‘엘리엘리라마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외친 것이다. 모두가 절규에 해당하는 말들이기에 차마 번역하지 못하고 예수의 입김 서린 말씀을 그대로 보존한 것이다. <뿌리깊은나무>를 보면서, 한자를 가지고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상을 한글로 무너뜨리려 하는 세종의 외침이, 병들고 장애에 시달리고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려고 크게 소리 지르는 예수의 외침처럼 들린
글쓴이 : 김재성(한신대 교수, 민들레성서마을지기)
제목: 뿌리깊은나무를 보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