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닦는 사람들
마르코 1:1-8
김재성
기다리는 사람들
대림절을 맞이하였다. 오늘이 대림절 첫째주일이라서 초를 하나 밝혔고 앞으로 하나씩 더 밝혀 나가게 될 것이다. 그 의미는, 우리
마음에 불을 하나씩 켜두고서, 스스로를 돌아보며 기도하는 가운데, 빛으로 오신 주님을 기다리자는 것이다.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먼저 보낸다. 그가 네 길을 닦을 것이다.”“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2-3절).
이스라엘 백성의 특징은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면서 주님께 기도했고 주님이 그들을 출애굽시켜
주시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모세를 보내셔서 그들을 구해내셨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을 때에도 주님이 해방해 주시기를 기다렸고 주님은 오묘한
방법으로 그들을 해방해주셨다. 지금은 로마황제와 헤롯왕의 압제하에서 신음하면서 거기서 풀려나기를 고대하고 있다.
마가 기자는 그의 복음서의 맨 처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 바로 이 기다림에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른바
묵시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 통치자들이 지배하는 이 시대가 가고 주님이 통치하시는 저 시대가 곧 온다고 믿는 가운데 나온 것이다. 그들은
구약성서와 묵시문학의 영향하에서 그들을 구원할 메시아, 그리스도가 곧 오시리라고 믿고 있었다. 세례요한은 그를 “오실 그이”라고 불렀다(마
11:3).
누군가를 기다리는데 오지 않아서 애가 타거나, 누군가의 편지나 소식을 애타게 기다려 본 사람은 기다림이야말로 가장 힘들고 피곤한
것이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특히 무엇이든지 즉석에서 해결하는 인스턴트 문화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뭘 기다린다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음식점에
가서도 5분 내에 나와야 하고 커피 자동판매기도 편리한데 종이컵에 커피가 고이는 그 몇 분을 참지 못해서 손을 데기도
한다.
하지만 기다림은 희망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이를 기를 때 엄마가 어디 갔으면 아이는 계속해서 엄마 어디 갔느냐고 묻는다.
아빠는 어디 갔는데 몇 시쯤 올 거라고 말해준다. 아이는 자기 일을 하면서도 엄마 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린다. 지루해도 희망이 있다. 그런데,
가끔 연속극에 나오는 거지만, 실제로는 엄마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는데 아이에게 차마 말을 못하고 미국에 갔다고 몇 밤 자면 온다고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아이는 왜 빨리 안 오느냐고 보채고, 그 아이를 달래는 아버지는 가슴이 미어진다.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없을 것이다. 누군가
기다릴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러니까 행복한 것이다.
현대인에게 문제는 그런 기다림이 아니라, 보다 궁극적인 존재에 대한 것이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Godot)를 의미 없이 기다리는 사람들의 공허함과 의미 없는 지껄임을 탁월하게 묘사했다. 그들이 지겨워서 그
기다림을 그만 두려고 하면 한 사람이 늘 고도가 내일 온다고 했다고 말을 전해 준다. 하지만 몇 년을 기다려도 결국 고도는 오지 않는다. 그들은
고도가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너무나도 지루한 일상을 반복하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다. 끝내 고도는 오지 않는다.
고도는 God와 이름이 너무나 비슷하다. 어쩌면 그 연극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신을 그렇게 묘사한 것인지도 모른다. 오지 않는 신 앞에서
느끼는 적나라한 권태와 삶의 무의미성에서 드러나는 실존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 현대인 앞에서 시간의 흐름도 공간의 이동도 큰 의미가 없다. 삶에는 무슨 지향성이나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삶의 의미이지만, 현대인에게는 그런 목표가 없다. 단지 ‘지금, 여기’라는 텅 빈 상황으로 제시되는
그 시공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오지 않고, 아무도 가지 않는‘끔찍한’세계이다.
이런 경험은 크리스천에게도 얼마든지 다가온다. 다음은 어느 교회 사모님의 글이다.
"얼마전에 교회 잘 나오던 여집사님이 '교회를 쉬겠다고 한다'는 말을 그 소속 구역장으로 부터 전해 들었다.
... 그 집사님은 신혼 때부터 교회를 나왔는데 가정적으로 힘든 일들이 많이 있었다. 얼마 전에도 시어머니를 모시다 병원에서 몇 달을 수발하고
결국 돌아가셨는데 물질적인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 두 주가 지나서 혼자서 심방을 갔다. 다른 때같지 않게 무표정한 얼굴로 마지못해 말을
하는데 자기는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했다. 아니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한다면서 하나님이 계신다면 자기를 이렇게 힘들게 할 수는 없을 거라고
했다. 하나님을 믿지 않기로 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 졌다고 하면서 다시는 자기를 찾지 말라고 했다. 많은 말로 위로를 했지만 들으려고 하지를
않았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더욱 기다리던 순진한 신자들은 이제 찾기가 힘들어지고 있다. 조금만 일이 잘
안 되면, 왜 나만 이런 일을 당하느냐고 하면서 하나님께 항의를 하고 회의를 품기도 하고 교회를 떠나기도 하는 것이 오늘의 신자들의 모습이다.
그들은 분명 기다림을 잃었다.
사회적으로도 그렇다. 60년대에 우리는 잘살아 보세를 외치면서 가난으로부터 벗어나는 날을 기다렸다. 70-80년대에는 군사독재에서
벗어나 민주화되는 날을 기다렸다. 또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면서 통일의 그날을 기다려 왔다. 하지만 오늘날은 어떤가. 빈부격차가 너무
심해서, 더 잘 살게 되었어도 아무도 행복하지 않다. 군사독재가 끝나고 민주화가 되면 뭐 달라지는 게 있느냐는 회의주의가 판을 친다.
4.19세대도 유신정권에 다 들어갔고, 3.86세대도 결국 정권에 들어가니 별로 기대할 것이 없더라면서 정치에 대해서 회의를 느낀다. 엄청난
통일비용 때문에 차라리 천천히 통일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도 많다. 뭐 하나 간절히 기다리는 것이 없다.
그러나 기다림이 사라진 자리에 대신 들어온 것은 무엇인가? 고도가 더 이상 오지 않는 것을 안 그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시간
죽이기’(킬링 타임)뿐이었다.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게임기와 오락기 그리고 화투장 앞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가. 그런 시간 죽이기
다음에 나타나는 것은 허무주의뿐이다.
전에는 아이가 자전거를 사 달라고 조르면 농부인 아버지는 나락 베면 사주마, 송아지 낳아서 팔면 사주마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아이는 희망을 가지고 논을 바라보고 소꼴을 뜯어다가 열심히 소를 먹인다. 몇 달이 지나서 그렇게 원하던 자전거가 생기면 그것은 쇳덩어리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이 된다. 송아지의 추억, 아버지의 사랑, 그리고 그 자신의 땀과 기다림이 밴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어떤가. 부모의 결심만
문제다. 허락이 떨어지면 카드를 갖고 가서 한번 그으면 끝난다. 기다릴 것도 없고, 그것은 쇳덩어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고장 나거나 싫증나면
버리면 그만이다. 자전거보관소에는 버린 자전거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고 한다.
기다리는 삶
성서는 신자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그리고 있다. 특히 시편은 온통 기다림의 노래다(시 33:20; 42:5, 11; 43:5;
130:6). 예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청한 아리마대 요셉에 대해 성서는 그를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묘사한다(막 15:43; 눅 23:51).
또 예수께 정결례를 베푼 예루살렘의 시므온에 대해서 성서는 이렇게 묘사한다.
그 사람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므로,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다(눅
2:25)
그는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고, 평생을 기다려온 사람이다. 그가 아기 예수를 자기 팔에
안았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이제 주께서는 주의 말씀을 따라, 이 종이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갈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눅 2:29-30).
이것이 기다리는 사람의 모습이다. 평생 누군가를 기다리고 한번 보기만 해도 그것으로 삶의 의미가 충만해지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함석헌은 <얼굴>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이 세상 뭘 하러 왔던고?/ 얼굴 하나 보러 왔지./ 참 얼굴 하나 보고 가잠이/ 우리
삶이지.
사도 바울 또한 그의 서신 곳곳에서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한다(롬 8:19, 25; 고전 1:7; 갈
5:5; 빌 3:20).
이런 정성어린 마음들, 간절한 기다림의 마음의 끝에 메시아가 오시고 복음이 온다.
오늘 본문에 보면 복음의 시작은 기다림이다. 본래 복음이라는 말의 의미가 간절히 승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날아든 승전보이다.
기다리는 사람이 없으면 복음이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마가복음의 시작도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세례요한은 그냥 앉아서 기다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나서서 오실 그분을 위해서 길을 닦고 예비하고 있다. 그는 광야에서 살면서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그래서 온 유대 지방 사람들과 온 예루살렘 주민들이 그에게로 나아가서,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4-5절). 그것은 그저 종교운동만이 아니었다. 그 많은 사람들에게 그는 갱신 또는 개혁운동을 하고 있었다.
요세푸스라는 역사가는 세례 요한에게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서 헤롯이 그를 위험분자로 여겨서 처형했다고 한다. 이는 세례 요한의 활동이
은둔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를 변혁시키는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세례요한은 그 인기를 볼 때, 편하고자 했으면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광야의 소리가 되어 오실 그이를
위해 길을 닦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알았다. 그 일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그는 감옥에 갇혔고 죽음을 앞두게 되었다. 그가 제자들을 보내서
예수께 “당신이 오실 그분입니까”하고 묻는다. 예수가 그분이 아니라면 그의 죽음도 억울하고 헛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예수가 오실 그이가
맞다면, 그를 위해 길을 예비하다가 죽임을 당하는 것은 헛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담당할 몫이다. 예수가 오실 그이임을 안 후에 어쩌면
그는 기다리던 분을 마침내 만난 사실에 감옥에서 죽임 당하면서도 기뻤을 것이다.
크리스천은 오실 그이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분을 기다리는 가운데 현재의 삶은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일을 이루기
위한 과정으로 여긴다. 자신의 삶의 목표는 현재 여기서 소유하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소유와 시간과 존재를 통해서, 주님이
이루시려고 하는 사명을 이루는 것이다.
겸허한 삶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이가 내 뒤에 오십니다. 나는 몸을 굽혀서 그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7-8절).
크리스천의 현재는 오실 그이에 의해서 규정된다. 그분이 오시지 않는다면, 고도를 기다리는 사람들보다 더 불행한 이들이 될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세례요한은 예수께서“오신다”(erchetai)고 현재형으로 말한다. 그것은 막연한 미래를 말하거나 추측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오시는 것은 그 당시로는 미래의 일이지만 가장 확실한 사실인 것이다. 오실 그이를 기다리는 데서 크리스천의
현재는 의미로 충만해진다. 그리고 세례 받고 형제자매와 밥상을 같이하고 같이 기뻐하고 친교한 모든 과거가 충만한 의미 속에서
되살아난다.
미래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억에 의하여 존재한다. 우리는 세례요한의 자리에 있지 않다. 세례요한이 죽고 난 후에
갈릴리에 오셔서 활동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우리는 알고 있다. 그분은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셨고, 오늘 우리는 그분이 오시는
것을 기다리며 산다. 세례요한은 “오실 그이”냐고 물었지만, 우리는 이미 오신 그 분이 다시 오시는 것을 알고 있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주인공들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과거를 잘 기억한다. 성경이 온통
하나님의 구원사에 대한 기억이다. 크리스마스의 기억은 오늘 나에 대한 긍정이요 존재에 대한 긍정이 된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것은 2천 년 전
베들레헴의 현장으로 가는 체험이요,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미리 만나는 체험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기억 때문에, 이 기대 때문에 오늘
세례요한처럼, 오실 그이를 위해서 길을 닦는다.
요즘 연말이라고 길들을 많이 갈고 있다. 길을 닦아 놓으면 차는 훨씬 더 잘 지나가게 된다. 요즘 사람들은 남이 길을 닦아 놓으면
그 위로 차를 모는 데 익숙하다. 대접하기보다는 대접 받는 데 익숙하다. 그런 사람에게 예수가 오실 수 없다. 예수는 세례요한처럼 겸손히 허리를
굽히고 누군가를 위해서 길을 닦는 사람에게 오신다. 군림하려는 왕궁의 임금들은 예수의 적대자일 뿐이었다. 아스발트 길을 닦고 식당에서 식탁을
닦는 사람들이 행복한지 모르겠다. 그러나 주의 길을 예비하고 닦는 사람은 분명 밝고 행복한 얼굴일 것이다. 그토록 그리워한 그 얼굴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내가 온 의미를 찾고 사명을 다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 기간에 여러분 가슴 가슴에 대림초를 밝혀두고 겸허한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리시기 바란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는 것 같이, 예루살렘의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기다린 것 같이, 세례요한이 성령으로 세례 줄 오실 그이를 기다린 것 같이 간절히
주님을 기다리시기 바란다. 오늘 하루하루의 삶에서 길을 닦는 세례요한처럼, 오실 그이가 오실 길을 평탄하게 하고 길을 닦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대림초보다 더 밝은 주님의 빛이 여러분의 얼굴과 삶 속에서 환하게 빛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민들레성서마을지기
제목: 길을 닦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