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에게 있어 ‘죄송하다’는 말의 쓰임새는 섬세하게 분류되어있다. 이를테면 잘못의 강도에 따라 대단히 잘못했으면 '고멘나사이'(ごめんなさい)를,
그냥 조금 미안하다 싶으면 '스미마셍'(すみません)을
쓰면 된다. 또 뭔가 부탁할 때 '저, 죄송한데요.'라는 의미의 '죄송'은 '시츠레에시마스'(しつれいします)를
쓰는데 이때의 죄송하다는 잘못했을 때의 '죄송합니다.'의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그 어떤 의미에서든 일본인의 ‘죄송’은 상대에 대한 배려와 자신에 대한 경계가 삼엄하게 복합되어 있다. ‘죄송’으로 정리되는 일본인의 팽팽한
긴장의 내면은 닛본도(日本刀)의 일섬(一閃)만큼 ‘죄송’한 사태에 대해 즉각적이고도 급박한 반응을 드러낸다. 다급한 사과는 칼로 내리치는 속도와
거리만큼 짧고 긴박해 보인다.
일본인들은
칼을 사랑하면서 또 동시에 두려워한다.
칼이
휘둘러지는 거리는 일순에 확보되고 칼이 내리쳐지는 순간은 섬광과 같은 단순함으로 요약된다. 그리고 그것은 피비린 내나는 가공할 결과를 초래하기
마련이다.
전란과
살육의 역사를 거치는 동안 칼을 뽑는 시간과 그 칼이 내리쳐지는 공간과 속도에 대한 일본인들의 전율과 공포는 거의 유전적인 체험에 가깝게
내면화되어 있다. 칼이 이룩한 피의 역사를 유전 형질처럼 내재화하면서 그들은 칼이 뽑혀지는 상황 자체를 두려워한다.
천황을
정점으로 피라미드와도같이 쇼군(將軍)과 다이묘오(大名) 그리고 그 아래 일반중신과 사무라이를 수직 계열화하는 일본의 지배전통은 단 한 치의
개인적 일탈도 용인하지 않는 살벌한 무가적(武家的) 질서를 이룩하였다.
이때
개인의 저항이란 오직 칼로 다스려질 뿐이다.
그리고
그 다스리는 칼에는 온정이 없다.
그
질서가 삼엄한 군사적 긴장으로 가지런할 때만 일본은 평화로울 수 있었다.
전국시대의
개막을 연 오닝(應人)의 난 이래 난세를 바로잡고자한 모든 혁명적 무장들의 꿈은 바로 이 무가적 질서와 전통의 회복이었다.
다케다(武田)도
오다(織田)도 도요또미(豐臣)도 도꾸가와(德川)도 모두 마찬가지의 꿈을 꾸었다. 그들은 죽고 죽이는 세상의 슬픔으로 무장한 난세의 인간들이었다.
죽일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그들은 죽음을 멈추게 하기 위해 죽이고 죽이다 마침내 죽어갔다.
그들은
평화를 위해 화해와 타협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피아를
불문하여 인간군상의 영고성쇠에 대한 한없는 허무와 비애로 몸을 적시면서도 오직 칼로써 비장하게 난세를 돌파해야했다. 그들에겐 인질로 보내어지거나
적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되는 자신들의 일족에 대하여 슬픔을 보일 여가조차 없었다. 개인의 운명은 가문전체의 그것에 복속되어야했고 세상은 오직
칼로써만 다스려져야 했다.
그리하여
칼로 이룩된 평화 속에서 냉엄한 칼의 전통은 오늘날 일본인의 내면에 유전자처럼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인으로선 타인과의 대면에 있어 상대의 칼이 칼집에서 벗어나기 전에 바쁘고 빠르게 사태를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일본인의 ‘죄송’이
섬세하게 분화되고 급박하게 표명될 수밖에 없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일본의 도시 여기저기서 ‘스미마셍’이 끝없이 되풀이 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인의
공간과 시간에 대한 감각은 칼이 내리쳐지는 거리와 속도만큼 협소하고 급박하다. 그 좁고 짧은 상태와 상황을 잃어버리면 일본인의 미의식은 급격히
소멸한다. 일본인에게 시간과 공간은 오직 짧은 기합으로 단일화되어야할 대상인 것이다.
길게
늘어지는 것은 그들에게는 도무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할복하면서도
일본인들은 17자의 하이쿠(俳句)를 절명시(絶命詩)로 남길 뿐이다.
부대끼는
공간과 순간에 대한 일본인들의 예민한 방어본능은 타인에게 끼치는 폐(메이와쿠·迷惑)끼침의 금기로 나타난다. 그 폐 끼침은 피해를 입은 상대에게
칼이 내려쳐지는 공간과 순간의 허여를 뜻하고 그것은 즉시 칼의 거리와 속도로 전환되어 결국 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남에게 폐를 끼치기는커녕
오히려 스스로 엄청난 고난을 당해도 본능적으로 그들은 ‘폐를 끼쳐 죄송하다’는 말로 사태를 요약한다. 이라크 내 테러조직에 납치됐던 일본인
고다(香田)씨가 끝내 살해됐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가족들의 첫마디는 “여러분들에게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였다.
일본의
유아들은 실내에 들어설 때 신발을 가지런히 밖으로 향하게 하는 것부터 배운다. 그것은 자신이 밖으로 향할 때 급히 신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들이
자신의 신발 때문에 어지럽게 신을 신어야 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결국 아이들은 짧은 한 순간이 자아낼 수 있는 치명적 사태에 대한
두려움을 일찌감치 훈육 받는다.
이러한
생활 속의 경계는 숨 막힐 정도로 날카롭고 서늘한 풍경을 이룬다.
이
풍경에는 방어를 넘어선 공격성마저 잠들어 있다.
일본의
정원에 자갈이 깔려있는 것은 적의 발자국 소리를 듣기 위함이고 일본의 가옥에 방마다 다다미가 깔려있는 것은 장지문을 걷었을 때 칼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일본인의 공간은 수세와 공세가 교차하는 싸늘한 시간 속의 공간이다.
이렇게
예리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본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스미마셍’을 아끼지 않는다. 사과와 죄송의 실질적 내용보다 그것들이 이루어지는 타이밍에
더 집착하면서 오늘도 일본인들은 서로에게 ‘스미마셍’을 거듭한다. 사과의 실기(失機)를 치욕으로 여기며 일본인들은 정중하게 ‘도모
스미마셍’(대단히 죄송합니다)이라 한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왜 이렇게 죄송하다는 말을 듣기가 힘든 것인가.
우리는
그저 정치적 수사로 유감만을 들을 뿐이다.
무엇을
그렇게 매번 느껴 늘 ‘느낌이 있다’(有感)는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스스로 ‘섭섭하고 불만스럽다’(遺憾)는 말을 ‘죄송스럽다’는 말로
알아들으라는 것인지 도무지 애매한 오리무중(五里霧中)이어서 그야말로 유감천만(遺憾千萬)이 아닐 수 없다.
왕수님의 블러그
강가에서
제목: 도모 스미마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