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지성소
김 재
성
(한신대 교수/ 민들레성서마을지기)
우리가 꺼질 수 있는 얼음 위를 걸어갈 때 절대로 두
발을 동시에 딛지 않는다. 그러다 빠지면 그대로 익사다. 한 발은 단단한 곳에 두고 다른 한 발에 무게를 싣지 않고 살짝 건드려보고 괜찮으면 좀
더 세게 그렇게 해서 단단한 것이 확인되면 그때야 무게를 실어서 발을 디딘다.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조심성 없이 무턱대고 발을
내디뎠다가는 문제 속으로 빠져서 허우적댈 수 있다.
이광수의 <꿈>이라는 소설이 있다. 조신이라는
젊은이는 스님이 되기 위해 노력중인데 잡념이 많다. 하루는 어여쁜 여인이 불공을 드리러 왔는데 얼핏 보고 나서 자꾸만 그 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러다 나중에 용기를 내어 그 여자에게 다가가서 사정을 들어보니 그 여자는 누군가와 멀리 도망을 갔으면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신은
용기를 내어 그 여자와 함께 도망을 하고 계속해서 추적을 받고 그러면서 아이도 낳고 하지만 가난을 견디지 못한다. 어느 날 뒤쫓아온 추적자는
절에 같이 있던 친구인데 이제는 원수가 되어서 억지로 방에 들어와 자더니 나중에는 이제 어린 조신의 딸까지 겁탈하려 한다. 조신은 그를 죽이고
만다. 이제 살인자가 되어 도망다니다가 결국 붙잡히게 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려는 찰라 목에 밧줄이 묶여서 소리를 지를 때 깨어보니 꿈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세상적인 것에 대한 탐욕과 집착 불안과
후회 등등으로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간다. 다들 고생해서 대학에 입학할 때, 신랑신부입장을 할 때, 간신히 취직하여 첫 출근을 할 때, 설렘을
안고 환한 얼굴로 시작한다. 하지만 몇 달 안 가서 대학생은 취직걱정, 신혼부부는 아이 낳고 차 사고 집 사고 살림 늘리는 걱정, 직장생활하는
사람은 상사와 동료와의 갈등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술집에서 성토하게 된다. 겉으로는 멋진 시민인데 속은 뭔가 공허하고, 다 타버린 듯하고,
속아 사는 듯하고, 건지는 게 없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조신이처럼 일탈을 꿈꾸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사랑한다 하면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것 같은 감정에 사로잡힌다. 영원히 사랑한다고 맹세도 하고 있는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 마음을 많이
주면 줄수록 그것이 사랑이 아니었다거나 배신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받는 상처는 비례해서 커진다. 그래서 똑같이 태양은 빛나고 별은 빛나건만
혼자 버림받았다고 느끼며 혼자 패배했다고 느끼고 혼자 더럽혀졌다고 느껴서 자살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모두 그것이 살얼음인지 두꺼운
얼음인지 두드려보지도 않고 두발을 내디딘 탓이다. 조신의 경우에는 꿈이라는 장치가 있어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리셋 버튼이 작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는 리셋 버튼은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세상의 쾌락, 눈에 보이는 유혹, 재물의 유혹 등등에 쉽게 몸무게를
실어주어선 안 된다.
우리는 단단한 기초 위에 발을 디뎌야 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지성소이다. 핵무기가 와도 깨뜨릴 수 없는 지성소를 우리 안에 간직해야 한다. 그 지성소에서는, 하늘에는 창으로 아름다운 별과
달이 보이고, 창을 열면 시원한 바람과 수목의 냄새, 멀리는 바다가 보이고 바닷바람도 불어온다. 문을 열면 뜰에는 꽃들도 피어 있다. 정원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책도 음악도 있다. 여기는 아무도 못 들어온다. 주님만 나와 계실 뿐이다.
우리는 저마다 근심걱정 때문에 지성소를 갖지 못하며, 혹
갖고 있다 해도 기둥도 뽑히고 축대도 무너진 만신창이의 모습이다. 구약성서에서 지성소는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도피성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살인자라도 이곳에 들어가면 잡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삼한시대에 소도라고 하는 도피성이 있었다고 한다. 아무리 죄인이라도 거기
들어가면 못 잡는다. 이는 인간이 다 지배할 수 없는 곳이 있어야 이 세상이 돌아간다는 증거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다
CCTV로 찍는 세상에 산다. 압구정동은 범죄 예방을 위해 행인들까지 다 찍는다고 한다.
70년대에 유행한 <나는 못난이>라는 노래가
있다.
“해도 잠든 밤하늘에 작은 별들이 소곤대는 너와 나를 흉보는
가봐. 미소짓는 그 얼굴이 하도 예뻐서 입맞추고 싶지마는 할 수가 없어. 누군가가 요놈하며 나설 것 같애. 할까말까 망설이는 나는
못난이.”
미국사람들이 이 가사를 읽는다면 이상하다 생각할지
모르겠다. 애인이 사랑스러워 소곤대는데 왜 남들이 흉을 보며 입을 맞추는데 누가 ‘요놈’하고 나서는가? 하지만 우리나라 70년대 정서에서는 그
노래가 잘 이해가 갔고,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 우린 저마다 누군가 흉보고 요놈한다는 두려움을 갖고 산다. 아마 창피와 염치를 가리는 문화
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어떤 감시 카메라도 미칠 수 없고 어떤 법의 힘도 미칠 수 없는 곳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만이 주장하시는
곳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누구도, 핵무기도 뚫을 수 없는 지성소를
가져야 한다. 그것은 먼저 기도와 찬양과 말씀으로 된다. 늘 주님께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읽고 듣자. 예를 들면 하루에 일정한 기도시간을
정한다. 유대인들도 이슬람사람들도 하루 세 번 기도한다. 우리도 기도시간을 누가 뭐래도 철통처럼 지키자. 이를테면 유연하게 집에서 일하는 사람은
일정한 시간 또는 새벽기도도 좋고 또는 너무 일찍 출근하는 사람은 출근하는 차 안에서 또는 전철 안에서 자기만의 기도 시간을 갖는다. 이것만은
하늘이 무너져도 꼭 지킨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시간의 지성소만은 그 무엇에 의해서도 침해받지 않아야 한다. 놀이, 급한 일, 돈 버는 일,
등등에 한번 침해당하면 쉽게 무너져서 그것을 지킬 수 없다. 그와 동시에 나만의 지성소도 함께 무너진다. 시간의 지성소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장 효과적이고 든든한 것이다.
매일 일정한 시간 창의적인 일을 해야 한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창조하시는 분이다. 창작에 관심이 많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창작의 결과다. 자연히 우리는 창작할 때 행복하게 되어 있다.
자신의 직장일이 바로 그런 일이면 제일 좋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한다고 하고 지겹다고 한다. 하지만 이른바
<달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 지겹다고 하는 일을 재미나게 하는 사람들이다.
얼마 전 SBS스페셜 <몰입>이라는 프로를
보았는데, 평생 뜨개질만 하는 한 아주머니가 뜨개질을 하면 행복하다고 하면서, “행복은 다른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행복한 사람들의
특징은 저마다 외부에서 행복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는 일을 즐기고 거기에 몰입이 되어서 행복이 속에서 솟아난다는 것이다. 그 아주머니는
자신은 의식하지 못할지 몰라도 자기만의 지성소를 갖고 있는 것이다. 밖에서 전쟁이 일어나도, 그 아주머니는 털실과 뜨개바늘만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
꼭 정해진 시간만큼 사랑을 해야 한다. 가족 간의 사랑,
친구와의 우정, 동료와의 인간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귐 등등 사랑할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느낌 그리고 사랑받는다는
느낌은 우리를 활기 있게 하고 젊게 하고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고 생을 긍정하게 한다. 사랑을 표현하는 데는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되고 마음만 열면 된다.
그리고 놀이의 지성소를 지켜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루에 정한 시간은 놀아야 한다. 기왕이면 운동하면서 산소를 호흡하면서 하는 놀이가 좋다. 산책이나 요가는 아주 좋은 놀이일 것이다. 운동도
좋고,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하고 몸을 어루만지고 포옹하는 것도 가장 기쁜 놀이이다. 개나 고양이가 지내는 걸 보라. 서로 핥아주고 건드리고 무는
척하고 뒹굴고... 아무런 게임규칙 없어도 건강하게 잘 논다. 아이들도 그렇다. 우리 어릴 때, 깡통만 있어도 안에 자갈 넣고 차고 다녔고,
대나무만 있으면 칼쌈하고, 자치기하고 술래잡기하고, 심지어 눈싸움하고 싶은데 눈이 안 오면 연탄재 부드러운 것 깨어서 던지면서 놀았다. 하루종일
놀아도 지루하지 않고 친구들이 너무너무 좋았다. 잘 노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고 속에 지성소를 견고히 하는 사람이다.
제일 어리석은 사람이 자기에게 없는 것 때문에 우울해
하고 불행해 하는 사람이다. 이 사회는 빈부격차 속에서 늘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면서 살고, 늘 이 세상이 주는 욕망에 자신의 행복을
맡겨 버리고 살라고 한다. 그렇게 살면 이 사회 소비문화의 종노릇만 할 뿐이다. 그러는 한 그는 거기서 상처를 입고 쓰라린 마음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은 반드시 내가 한 대로 갚아준다. 내가 창조적인 일을 못하고, 시간의 지성소를 잃어버리고, 하찮은 것에 운명을 걸고 그런다면,
반드시 우리는 허탈함과 외로움과 후회와 죄책감을 돌려받게 될 것이다.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라는 노래에서
“사랑이 외로운 건 운명을 걸기 때문이지 모든 걸 거니까 외로운 거야”라는 노랫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덧없는 이 세상의 것들에 운명을 걸면
우리는 외롭게 된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얼음에 운명을 걸면 외로움보다 더한 죽음이 우리를 기다린다. 우리가 외롭고 우울하고 창의적이지 못하고
시간을 죽이는 일만 하게 되는 것은, 세상의 그런 유혹에 시달려서, 벙커와 같아야 할 내 지성소가 비닐하우스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비닐하우스가 조금만 잘못해도 찢어지듯이, 그런 사람은 너무나 상처를 잘 받는다. 누가 말 한 마디만 해도 하루 종일 우울하고, 운전하는 데 길이
좀 막혀도 분노가 치밀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온통 불만이고 원망이다. 그런 사람에게 행복이란 없다. 그런 비닐하우스는 걷어 치워버리자.
태풍이 와도 무너지지 않을 든든한
벙커 같은 마음의 지성소를 간직하자.
민들레성서마을
제목: 내 마음의 지성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