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무쟈게 쏟아지는 비를 보면서

저는 80년 초, 종로의 한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가 봤습니다..

 

그날도 비가 어지간히 오던날 어스름한 저녁,,

저는 수업을 마치고 23번이었던가 집에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웬 아가씨가 우산안으로 쏙 들어오더니 같이 좀 쓰자 하더군요..

전 흠칫 놀랬지만,,자그마한 키에 오목 조목 작은 얼굴의 아가씨였습니다.

 

아무 말도 안하고 있자니,,영 분위기가 쑥스럽기에,,

어느쪽으로 가시냐?고 물었더니,,마침  같은 동네행 버스를 기다린다 하더군요..

 

속으로야 이게 굴러온 떡이냐!고 생각했지만,,

 

"마침 같은 동네에 사니 잘되었습니다!"

 최대한 점잖은 목소리와 표정으로 말했지요.

 

버스를 타고가면서 어떤 학교를 다니느냐,,전공이 뭐냐,,등등 호구조사를 하다보니, 우연도 그런 우연이 없더군요..

 

그 아가씨는 청주에서 어떤 학교를 다니다 편입을 해서 서울로 올라왔는데,

저의 학교 옆에 있는 학교이며,,학년은 한 학년 아래라 하더군요..

 

집도 같은 동네,,학교도 같은 동네 학교,,이렇게 공통점이 많은 아가씨가

우연히 비오는 어느날 제 우산속으로 뛰어 들어왔다는 점이 참 신기했습니다...그런데 그 아가씨와의 우연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 날 버스정류장에서 그 아가씨의 집까지 20여분 정도 비속에 우산을 같이 쓰고 바래다 주고 집에 도착해보니,,

 

아버지가 싱글싱글 웃으시면서 "너 어디 들렸다 오기에,,그렇게 옷이 젖었냐?" 하시더군요..

 

그 녀와 우산을 쓰고 버스에서 내리는 장면을 근처에 계신던 아버지 눈에 띈 것이죠.. 

 

뭐,,별로 할말도 없어 어떤 사람이 우산이 없다길래 집까지 바래다 주고왔다고 얼버무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생각해보니,,등신같이 이름도 모르고, 연락처도 못 물어 보고,,하다 못해 제 집 전화번호도 못주고 왔지 뭡니까?

 

내 손안에 내려 앉은 파랑새를 그냥 날려 보낸것 같았지만 어쩌겠어요..

제 주변머리 없음을 탓할 밖에요..

.

.

.

.

.

.

.

.

.

그런데 몇 일 후 엉뚱하게 제 고딩 여동생이

 

"오빠.....내 친구 언니하고 비오는 날 만났다매 !!.."

 

"엥..먼소리여...내가 은제 니 친구 언닐 만나.."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그 때 우리 집에서 제 여동생과 그 친구 하나가 과외를 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 친구 언니가 바로 그 빗속의 아가씨라지 뭡니까?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냐구요????

 

제 동생 친구는 그냥 친구가 아니고,,

저희 아버지와 육군대학 동기 분의 둘째 딸이었지요..

 

우산 쓰고 가면서 이런 말 저런 말 중에 아버지에 대한 말도

나오고 그러다 보니,,그녀는 제가 그 집 아들이구나 하고 감을 잡았던 것이지요,,

 

그후 어찌 어찌 연결이 되어,,그 아가씨와 영어회화를 같이 배우는

사이로 발전이 되었답니다..

 

한번은 영어공부를 하러 그집에 가서 보니,,

자기 방에 이젤을 펴 놓고 자기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턱 걸어놨더군요.

(뭐 별로 잘 그린 그림도 아니었지만,,자랑하고 싶었나 봐요)

 

집안끼리 아는 사이가 되다 보니,,여자 친구로 사귀기엔 좀 부담이 되어

명동에서 제 대머리 친구를 소개시켜 주려고 만났는데.

 

이 아가씨는 제 친구가 별로 맘에 안드는지,

그냥 저와 같이 집에 돌아 오게 되었습니다..

.

그런데,,바로 그날 사건이 생겼습니다..

.

.

명동에서 남산을 넘어 가면 우리 동네이니,,우리 한번 남산을 

걸어 가보자 하더군요..

 

남산 순환도로를 따라 가다 보니,,컴컴한 산 구석 구석마다

아베크 족들이 쌍쌍히 붙어 앉아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자니,,저도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면서,,

우리도 저기가서 좀 쉬었다 가자 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점잖은 체면에 그럴 수 있나요..

 

그랬더니 그녀는 다리가 아프다며 힐을 벗어들고

그냥 차도와 인도 사이를 막아 놓은 야트막한 도장나무 아래 쭈그리고 앉았습니다..

 

저도 그 옆에 슬그머니 앉았더니

대뜸 "너 키쓰해봤어.."

.

저는 황당해서 "아니.."했더니만

.

"그럼,,지금 해봐!!"하지 뭡니까@@

.

.

남산 순환도로를 오가는 많은 차들이 비추는 헤드라이트가 번쩍일때마다,,

 

그녀의 꼬옥 감은 눈과,,이마와 뺨에 몇개 난 주근께인지 여드름인지

도 보였지만,,

 

그런건 아무 상관없이 ,,차도 옆 도장나무 아래 숨어서 한 저의 첫키쓰는

제 호흡과 의지를 붕괴시켰습니다..

 

숨이 막힐 때마다 좀 쉬었다가 또하고

입술도 얼얼하게 아플때까지 ,,그래도 더 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이제 그만!" 하고 일어서더군요..

 

집에 돌아와 생각하니,,무척 찝찝했습니다...

 

왜냐구요..

원래 총각들은 여자가 적극적으로 나오면 겁을 먹게 되 있거든요..

 

그래서 다음에 만나자는 약속을 바람 맞히고 나가질 않았습니다..

 

한참 후,,제 여동생이 지 친구가 했다는 말을 전하더군요..

 

"얘..왜 니 오빠는 우리 언닐 바람 맞히구 그런대니..??"

.

.

.

몇 개월 후 우연히 학교앞에서 그 녀를 만났지만

그냥 "잘 지냈니.."하고 웃으면서 헤어졌습니다..

 

제가 살아오는 동안 그녀만큼 우연으로 점철된

만남은 아직 없었습니다만,,그 이상의 인연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당돌하고 귀여운 아가씨였는데..

괜히 지레 겁 먹어 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