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게 보훈병원가는 재미(?)를 더해 주셨던 환우 한분이 생각보다 빨리 퇴원하셔서 이번 주에는 제마음이 무척 서운하였습니다.
조기 퇴원이야 당연히 축하드려야 할 일이지만, 정들었던 분을 다시 뵐 수 없다는 석별의 아쉬움 같은 것을 느낍니다.
일흔도 중반을 넘긴, 정읍 부근에 사시는 촌로(村老)이셨는데, 얼굴 표정이나 목소리에서 푸근함과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이 분과 처음 대화를 나누게 된 사연과 그 내용을 생각하면, 지금도 슬그머니 웃음이 나옵니다.

 

그날, 저희 봉사자들이 막 들렸다 나온 병실에서 젊은 자매님 한분이 뒤따라 오더니, "저희 아버지를 위해 기도를 좀 해 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사연인 즉, 자녀들이 모두 장성하여 일가를 이루고 살면서 성당엘 다니게 되었고 종교가 없는 친정 아버지께도 성당을 다니시라고 입교 권면을 했으나, 막무가내로 거부해 오셨다고 합니다.
자녀들의 청을 마다하신 적이 없는 넉넉하신 분이었는데, 유독 신앙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요지부동이셨고, 그러다가 암까지 발견되어 입원하게 되셨다는 겁니다.
또, 연세가 있는만큼 수술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게 자녀들 생각인데, 병원 측에서도 결과는 반반이라고 하는데, 수술을 받고 싶어 하시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어려움도 토로하면서 아버지를 위해 기도를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아버지를 꼭 성당으로 인도하고 싶고, 가능하면 대세라도 받으시게 하고 싶다는 얘기와 함께...

 

원목 봉사자들은 보통 병실을 돌면서 입교권면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경우는 원목 봉사자들이 조금 난감해지는 경우입니다.
어떤 신앙이든지 그 환우의 믿음을 존중해 주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원목 봉사자 본연의 역할이지, 전교하는 것이 봉사자의 임무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교인이든 개신교인이든 불교인이든 도움이나 기도를 요청해 오면 조건없이 찾아가 도움과 기도를 해 주는 것이 가톨릭 원목봉사의 지침이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어쨋든, 따님의 요청으로 우리가 만나게 된 그 분은 인상이 무척 좋은 노인이었습니다.
"얼굴에 평화가 가득하신 걸보니, 남에게 좋은 일 많이 하며 살아오신가 봐요?", "좋은 일도 했었겠지만, 그것보다도 해꼬지같은 것은 별로 않하고 살은 것 같아요.", "얼굴에 모두 다 쓰여 있네요. 뭐" (웃음)
별로 부담이 없는 대화였고, 출발도 아주 좋았습니다.
"자녀들이 성당에 다니는게 싫으신가 봐요?", "그렇지는 않아요", "그럼 왜 성당 나가자는 자녀들의 얘기를 않들어 주세요? 다른 건 다 들어 주신다면서..." (한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김)
"양심이 있지. 평생을 그냥 살았는데, 천당가겠다고 다 늙은 나이에 아이들 말을 들을 수는 없잖아요?"(아이쿠...)
전혀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었습니다. 당황했고요.
쉽게 얘기해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으로 그냥 심판을 받는 것이 맞지, 늙은 나이에 헷까닥한다고 하느님이 봐 주시겠느냐는 얘기였습니다.
기도를 해드리겠다니까 그것마저도 정중히 사양을 하는데, 올곧게 살아오신 분의 고집이 이런 건가 싶었습니다.
첫 만남에서는 한발 물러서 타협(?)을 보았습니다.
한주일동안 잘 생각을 해 본후에, 다음주에는 편한 마음으로 대화도 하고 기도도 받아주기로...
그리고, 성당에 내려와 수녀님께 대화 내용을 말씀드리고, 직접 한번 찾아가 보셨으면 좋겠다고 건의를 드렸습니다.

 

그 다음주에 만났더니, 수녀님도 다녀가셨고, 본인 희망대로 수술을 받았고, 결과가 매우 좋다고 했습니다.
큰 수술을 받은 뒤여서인지 첫 만남때보다는 마음이 많이 여려진 듯 하였고, 넉넉한 대화들을 많이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제가보기에 이미 아버님은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계시니, 자녀들 소원인 세례도 받으시라"는 권유도 했습니다.
전보다 많이 기울어지긴 했어도, "좀 더 생각을 해야겠다"는 분위기였습니다.
"마음에 걸리시는게 있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집에서 성당까지 거리가 너무 멀어 주일을 지키기가 어려울 것 같다는 얘기였습니다.
연로하신 분들은 주일을 꼭 않지켜도 되고, 특히 노인 분들은 신부님이 찾아 다니면서 봉성체를 해 드리기도 한다고 안심을 시켜 드렸건만, "믿을려면 제대로 믿어야지..."하면서 또 요지부동이더군요.
따님과 저희들이 "아버님이 너무 옹고집이니 양보도 좀 할 줄 아셔야 한다"고 농을 섞어 웃기니까, 따라서 웃는 모습이 그렇게 천진난만일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듯 그 분 병실에 가면 항상 마음이 푸근해지고 그래서 주일마다 설레임 같은게 있었는데, 이번주에 가보니 퇴원을 하셨더군요.
주님 사랑의 씨앗이 그 분의 삶에 뿌려졌기를, 그리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으로의 작은 변화가 있기를 빌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