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 5,000m 가까운 지점이니 실내외온도가 따로 구별이 되지 않았다.

영하 몇도 쯤 될까?

목출모(눈만 나오는 복면 복), 털옷, 장갑은 물론 등산화도 신은 채 침낭 속에 들어가도 이 추위를 어찌 해 볼 수가 없었다.

잠을 자야지, 잠을 자야지.

그러나 이곳 키보에서는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잠이 들면 그대로 얼어 죽어버릴 것 같았다.

정상 정복을 위하여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결의를 다지며 에너지를 조금이라도 축적해두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어려움을 겪던 두 여자 대원도 정상까지 꼭 가고야 말겠다며 재삼 결심을 다지고 있었다.

한밤인 0:20분에 출발하여 정상을 정복하고 다시 이곳 키보를 거쳐 호롬보 산장까지 내려 가야한다.

내려가는 길에도 키보에서는 산소 부족과 추위로 잠을 잘 수가 없기 때문에 무 정차(?) 통과하여 약 17-18시간 반죽음의 행진을 계속해야한다.

눈은 더욱 더 또렷해졌다.

두통과 추위 때문에 끙끙거리고, 기침을 하고, 몸을 뒤척거리다가 밤 11:40분에 기상하여 아침 식사(?)를 했다.

모두가 스프만 몇 수저 떠 먹고 출발을 서둘렀다. 옆방의 이탈리아 팀, 스위스 팀도 일어나 웅성거리며 출발을 준비했다. 

 

제 5일,0:20분에 예정된 대로 정상을 향해 무거운 발길을 떼었다.

한밤의 야간등반, 화산재 쌓인 발이 푹푹 빠지는, 매우 가파른 경사 길을 지그재그로 걸어 올라갔다.

머리에 매단 헤드 랜턴, 양손에 마운틴 스톡(등산용 지팡이) 2개와 훈련해 둔 다리에 온 몸을 의지하고 말없이 행진을 계속했다.

얼마를 걸어 올라가다 보니 몸의 열기로 추운 기운은 사라졌다.

키보에서 떨며 보낸 몇 시간보다 훨씬 덜 고통스러웠다.

어두움 속에서 앞사람의 발자국만 따라가면서 기계적으로 관성에 따라 발자국을 옮길 뿐이었다.

경황 중에도 “인생은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하는 여행이 아니라, 스스로 힘껏 페달을 밟아야 나아가는 자전거 여행과 같다.”라는 글귀가 생각났다.

자, 또 한번 페달을 힘껏 밟아보자.

가쁜 숨을 몰아쉬는 대원들을 보며 캡틴 자와디가 속도를 조절했다.

다섯 발자국 정도 올라가 쉬고 숨을 몰아쉬어 산소를 공급했다. 힘든 행군은 이렇게 계속되었다. 

이런 고지의 등반은 날씨가 생명인데 그날의 날씨는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어느새 내리기 시작한 킬리만자로의 거센 눈발에 시야가 몹시 가렸다.

수평으로 매섭게 때리는 눈발을 헤치며 나아갔다.

희미한 헤드랜턴 불빛을 신호삼아 걸으면서 외워진 몇 개의 기도문이 나도 모르게 내 입속에서 새어 나왔다.

몽롱한 정신 속에서 매서운 칼바람과 눈발을 맞으며 전진을 계속했지만 이제는, 정말 이제는, 주저앉아 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 밤중에 이 곳에서 주저앉으면 나의 오랜 기다림은 거품으로 사라져 없어진다.

아니 꿈뿐만 아니라 어쩌면 생명도 끝장이다.

밤새워 또 내일도 거의 온종일 걸어야 하는데 이제 세 시간 남짓에 그런 생각을 하다니.

이제는 ‘뽈레 뽈레’를 외칠 것도 없이 모든 대원들의 걸음이 느린 굼벵이 기어가듯 자동적으로 느려졌다.   

물을 많이 마시고 호흡을 크게 하라고 자와디 대장은 누누이 강조하는데, 아무리 호흡을 크게 해도 답답한 가슴은 어찌 해 볼 수가 없었다.

아! 잡히지 않는 이 산소, 형체만 있다면 어떻게든 붙잡아 내 것으로 만들 텐데. 게다가 내 경우는 안경에 눈이 얼어붙어 시야가 가리어 고통과 불편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5,182m 지점에 있는 ‘한스 메이어’ 동굴(1889년 최초로 킬리만자로 등정에 성공한 독일인의 이름을 따서 붙인 작은 동굴)에서 눈과 바람을 피해 잠시 숨어들었다.

랜턴에 비친 지쳐 흐트러진 모습들. 짜증과 한숨, 고통과 후회, 어쩌면 나를 저주하고 싶은 끝없는 자책감이 나를 괴롭혔다.

한 여자 대원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호흡이나 몸의 흔들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자와디 대장이 곧 가이드와 함께 하산을 명령했다.

눈물을 머금고 돌아 선다는 말은 바로 이런 때 하는 말일 것이다.

아쉽고 섭섭한 마음은 어디에 비길 수 있을까만 생명을 담보할 수야 없지 않은가?  

고소증이란 바로 산소 결핍에서 오기 때문에 위험을 느낄 때 바로 하산하기만 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거짓말처럼 말짱해진다고 한다.

공기 중에 산소가 약 20%쯤 포함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3,000m쯤부터 고소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고도 약 5,000m에서는 공기 중 산소의 양이 약 10% 정도로 줄어들어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상당히 심각한 상황까지도 충분히 예상해 두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서로 격려의 말을 나누면서, “Let's start again.” 하자, 남은 모두가 다시 일어섰다.

이제부터 길만스 포인트(Gilman''s Point, 5,681m)까지 약 500여 미터는 바위투성이의 암릉이었다.

올라갈수록 눈보라와 칼바람은 더욱 매서워지고 이제 몸에 남은 에너지도 고갈되어간다고 느낄 무렵 먼동이 트면서 우리는 드디어 아침 6:30분에 길만스 포인트에 도착했다.

모두 반갑게 자축의 악수를 하며 기뻐했으나 남은 여자대원 두 명도 완전히 탈진 상태가 되어 일단 포터들과 함께 하산시키기로 했다.  

그런데 캡틴 자와디가 나머지 모두도 힘들어 하고 또 일기가 전혀 도와주지 않으니(키보 산장에서 함께 출발했던 이탈리아 팀, 스위스 팀들도 모두 중도 하산해 버렸다.) 더 이상의 행군은 큰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라며 모두 하산해야 한다고 힘주어 설득했다.